현재는 과거의 축적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현재’, ‘지금’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쉼 없이 항해하는 현재라는 배 위에 있는 것과 같다. 배는 지나가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을 뒤로 보내며 다가오는 시간을 향한다. 과거로 향한 시간은 배를 스쳐 떠나가지만, 우리는 항상 현재라는 배 위에 있다.
우리는 단지 앞에 보이던 물살이 이내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뿐이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간 과거 경험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기억하는 것의 축적이 현재를 지탱하는 대단히 많은 몫을 가지고 있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을 잡아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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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비존재의 동시성
내가 천착해가는 [역상 조각 / Inverted Sculpture]은 ‘없으면서 동시에 있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존재방식을 모색하면서 탄생된 것이다. 이 기법은 이처럼 존재와 비존재를 동시에 한 현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적절하게 활용된다.
역상으로 오목 들어간 인간의 모습은, 멀리 떨어져서보면, 마치 앞으로 볼록하게 나온 모습으로 보인다. 즉, ‘거기에 그 사람이 있다’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고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존재가 빠져나가고 남은 자국, 단지 오목 들어가서 알아볼 수 없는 웅덩이만 보이게 된다. ‘거기에 그 사람이 없다’.
‘없어졌다’는 생각은 ‘있다’고 판단한 사실이 있었기에 유발된 것이고, ‘있다’는 생각은 ‘없는 것을 보며 생각’된 것이다. 어느 경계가 있다와 없다를 나누는 지점이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를 판단하는 시각적 차이를 하나의 사실로 묶어내는 것은 ‘기억’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나의 역상조각 형식을 통하여, ‘있다와 없다’를 구분할 수 없으며, ‘현재와 과거’를 구분 지을 수 없는 존재방식, ‘있다와 없다’가 동시에 제시되는 방식, ‘기억과 현재적 인식’ 중 어느 것이라도 빼면 성립이 안되는 공존을 추적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0’은 텅 비어있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모여 가득 찬 상태 / 절대 어둠은 빛이 전혀 없으며 동시에 빛으로 가득 찬 것의 바탕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존재가 ‘양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갖고 있다.
나는 이를 역으로 뒤집어, 안으로 오목 들어간 ‘음의 상태’로 존재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두 상반된 상태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 여기기가 쉬우나, 이 두 존재 방식은, 서로 방향만을 반대로 할 뿐이고 거의 모든 점에서 동일한 조건을 갖게 된다. 역상 조각의 조형적 원리는 마치 수학에서 ‘0’을 가운데 두고, 한쪽 방향이 ‘+’로 숫자가 늘어난다고 할 때, 그 반대 방향으로 ‘-‘라는 기호가 붙는 것 외에는 동일한 원리로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과 같다. 즉 ‘0’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대칭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과 원리가 같은 것이다. ‘0’은 과연 무엇인가?
음이던 양이던 입체가 있으면, 그 위에 빛이 날아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면 대상이 보이는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되었지만 동일한 원리의 기반은 모두 ‘0’, 즉 ‘절대적 어둠’ 상태에 ‘빛’이 부가됨으로서 형상이 나타나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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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상 조각과 OLED의 공통점
역상 조각에서의 평면은 수학의 ‘0’과 같다. 여기에 부피가 붙거나 파이면, 조각의 고저가 빛을 받으며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평면은 절대 어둠인 ‘0’에 해당하며, 안으로 (‘-‘ 방향) 들어가며 만들어진 조각의 표면에 빛이 날아들어 형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밖으로 (‘+’ 방향)으로 나온 조각에 빛을 받는 원리가 동일하다. 다만 빛이 반대방향처럼 인식될 뿐이다. OLED의 암전상태, 즉 절대 어둠에서 출발하여 빛이 하나 둘 발광하며 형상이 생기는 것과 역상 조각의 평면에서 출발하여 안으로 오목 들어간 조각의 표면에 빛이 날아들어 입체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